젠슨 황이 떠났습니다. 4박 5일간 그는 말을 참 많이 했습니다. 삼겹살집에서 농담을 던졌고, PC방에서 리그오브레전드 선수 페이커에게 그래픽카드를 안겼고, 한국이 오랫동안 자기 마음속 특별한 자리에 있었다고도 했죠. 가는 곳마다 덕담이었고, 뉴스는 그의 행보를 받아 적느라 바빴습니다. 언론은 그저 국민의 알권리를 챙겨주느라 바빴죠.
사람의 속내는 가끔 한 말보다 안 한 말에서 새어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번엔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말고, 무슨 말을 끝까지 안 했는지를 들여다 봤습니다. 저는 우리 국민들은 알권리 뿐만 아니라 스스로 ‘생각할 권리’를 위해 뉴스에서 이야기 해주지 않았던 젠슨 황 소식의 ‘블라인드 스팟’에 대해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그는 '판다'고 했다
한국이 이번에 챙긴 가장 큰 성과로 다들 GPU 물량을 꼽습니다. 차세대 가속기 '베라 루빈'을 우선 공급받기로 했고, 작년부터 이어진 26만 장 약속도 다시 확인됐죠. 적지 않은 숫자이고 젠슨 황이 한국에 대한 애착을 다시 한번 느끼게 해주기도 합니다.
그런데 모든 내용을 비관적으로 천천히 읽다보면 단어 하나가 걸렸습니다. 바로 ‘공급’.엔비디아가 한국에 뭔가를 판다는 뜻입니다. 엔비디아가 한국에 돈을 쓰겠다는 게 아니라, 한국이 엔비디아한테 돈을 쓸 수있게 됐다는 쪽에 가깝죠. 그 GPU로 한국이 뭘 만들지는 또 다른 기회의 영역이지만, 적어도 황이 입에 담은 약속의 성격만큼은 또렷합니다. 확실히 그는 파는 쪽이었습니다.
그리고 같은 시기, 다른 곳에서는 다른 말을 했다는 게 문제입니다.
대만에는 집을 짓겠다고 했다
방한 직전 대만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4~5년 전 연 100억~150억 달러였던 대만 투자가 이제 1500억 달러, 200조 원 규모로 불어날 거라고. 대만을 "AI 혁명의 진원지"라 불렀고요.
말로 끝난 것도 아닙니다. 타이베이에 50년짜리 장기 임대로 땅을 확보해 새 본사를 올리기로 했습니다. 2030년 완공, 일자리 1만 개. 회사의 뿌리를 자기 돈 들여 대만 땅에 박겠다는 겁니다.
두 장면이 나란히 놓이면 온도 차는 분명히 다릅니다. 이쯤에서 대만을 질투하거나 시기하는게 아니라 대만에는 여기가 ‘내 집’이라고 했고, 한국에는 좋은 물건을 대주겠다고 했다는 것. 똑같이 웃으며 악수했어도 약속의 무게는 다릅니다. 한쪽은 주주가 되겠다는 말, 다른 쪽은 거래를 트자는 말이니까요. 황은 한국에서 누구보다 살가웠지만 '한국에 얼마를 넣겠다'는 그 한 줄만은 끝내 비워뒀습니다.
칭찬도 협상이다
젠슨 황은 삼성과 SK를 향해 더 많은 HBM이 필요하다며 치켜세웠습니다. 한국이 만드는 메모리가 자기 가속기의 심장이라는 거죠. 그런데 바깥에서는 이 칭찬을 곱게만 보지 않았습니다. 블룸버그의 한 칼럼니스트는 황이 한국과 대만의 협력업체를 일일이 돌며 추켜세우는 장면을 두고 오히려 우려스럽다고 적었습니다.
칭찬이 왜 우려스러울까요. 엔비디아는 칩을 설계하지, 직접 만들지 않습니다. 메모리도 생산도 죄다 한국과 대만 회사에 기댑니다. 그러니 공급업체를 향한 그 다정함은, 뒤집으면 자기가 얼마나 그들에게 매여 있는지를 들키지 않으려는 솜씨 좋은 관리이기도 합니다.
지금이야 메모리가 모자라 엔비디아가 아쉬운 소리를 합니다. 공급이 풀리고 저울추가 기우는 순간에도 그 다정함이 그대로일지는, 누구도 장담 못 합니다. 젠슨 황은 '파트너'라는 단어를 즐겨 썼습니다. 그 파트너 사이에서 누가 갈아 끼울 수 있고 누가 그럴 수 없는 존재인지, 거기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보태지 않았습니다.
결국 과제였다. 과제는 우리 몫이다
아 물론, 황이 한국을 음흉하게 대했거나 홀대했다는건 아닙니다. 그는 오히려 사업가답게 움직였을 뿐입니다. 살 사람한테는 좋은 조건을 내밀고, 아쉬운 상대는 기분 좋게 어르고, 정작 자기 돈은 가장 셈이 맞는 땅에 묻는 것. 확실히 역량과 마인드는 욕할 일이 아니라 오히려 배울 일입니다.
남는 건 결국 그가 비워둔 자리를 누가 채우느냐입니다. 그는 GPU를 팔겠다고 했지, 그걸로 뭘 만들지까지 책임지겠다고는 안 했습니다. 인프라는 사 올 수 있어도 그 위에서 굴러갈 쓸모 있는 Ai는 우리가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죠. 26만 장의 GPU가 비싼 장식으로 남을지 실제로 일하는 무언가가 될지는, 황이 떠난 오늘부터 우리한테 넘어온 숙제입니다.
그 일의 문턱이 예전만큼 높지도 않습니다. 요즘은 코드를 다 짜지 않아도 블록 엮듯 AI 흐름을 붙여 도구를 만들어 볼 수 있죠. Dify 같은 오픈소스가 그런 부류입니다. 깔린 GPU를 놀리지 않으려면 결국 이런 걸로 뭐라도 만들어 봐야 합니다.
젠슨 황이 떠난 후 우리는,
젠슨 황은 말을 잔뜩 남기고 떠났는데, 정작 '얼마를 넣겠다', '여기 뿌리내리겠다', '당신들 없으면 안 된다'는 말은 안 하고 갔습니다. 인색해서가 아닙니다. 사업가는 원래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니 덕담에 취해 있을 일이 아닙니다. 그가 비워둔 칸을 똑바로 보는 게 먼저죠. 좋은 물건을 팔러 왔고, 그걸로 뭘 만들지는 우리한테 떠넘기고 갔습니다. 박수와 환호는 이미 충분히 보냈으니, 이제 뒤돌아 우리 할일과 판단을 제대로 해야할 차례입니다.